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문단 편집) == 한국인 원폭 피해자 ==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네 >할아버지가 히로시마에 살고 계셨다네 >내 왼 손가락은 태어날 때부터 한 덩어리로 붙어있었죠 >언제나 주머니 속에 숨어있는 나의 왼손 >---- >김승진의 '[[https://youtu.be/-XBmH26ia8Y|새끼손가락]]'[* KBS2 주말연속극 [[달빛가족]] 수록곡으로, 원폭 참사 희생자들을 다루는 곡이다. 1회에서 등장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군수 도시였기에 [[징용#s-4.2.1|강제로 끌려와 노동에 시달리다가]] 원폭을 맞은 안타까운 한국인이 상당히 많았다. 또한 원폭 투하 후에 일제에 의해 잔해 제거에 우선적으로 강제동원되어 피폭되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 히로시마 총 인구 약 42만명 중 20만명이 피폭, 9~16만명이 수개월 내에 사망했다. 히로시마 인구 중 약 14만명(3분의 1정도)은 조선인이었으며 피폭자는 5만, 그중 약 3만명이 사망, 생존2만명 중 1만 5천은 광복 후 귀국, 5천명은 일본에 잔류하였다고 한다. 현재 피폭자 후손 등을 모두 합친 히로시마 피폭자 총 집계 74만여명 중 10만명 정도가 한국인이라고 한다.[* 히로시마시 공식 사이트[[https://www.city.hiroshima.lg.jp/soshiki/5/5465.html|참고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이트 상 한국원폭피해자 협회 조사결과 기재 사항[[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605|참고2]]을 참고한 값] 거기다가 부상자들은 일제에서는 자국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고, 이후에도 제대로 치료도 제공하지 않아 피해가 막심했다. 생존자 박남주 할머니의 증언으로는 히로시마 재일동포들은 현지 일본인들은 달리, 피폭을 당하고도 폭심지로부터 2㎞ 밖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할머니의 가족들도 그곳에서 광복을 맞이했다고 한다. [[https://www.news1.kr/articles/?5266853|#]] 해당 사례는 1979년 4월 7일 KBS-TV의 'KBS 무대'란 단막극 프로에서 방영된 [[https://youtu.be/bimGYe0uhLI|<희망>]][* 박수복 작가와 이유황 PD의 작품으로, 배우 나시찬과 김난영이 주연을 맡았다. 원래 1978년 가을에 방영하려 했으나 [[10월 유신|유신]] 치하에 10대 총선 시기라 방송사의 자체 심의로 불방됐다. 이듬해 서독 ZDF 푸트라에서 특별상을 받고서야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110900289120003&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6-11-09&officeId=00028&pageNo=20&printNo=2722&publishType=00010|방영됐다]].]과 [[재일교포]] 소설가 홍가이의 작품 <히바쿠샤>에서 다뤄졌고, 이 소설은 1989년 광복절 당시 KBS1 2부작 특집 드라마 <[[영주의 증명]]>으로 영상화됐으며 여러 차례 연극화되기도 했다. 나카자와 케이지 화백의 만화 [[맨발의 겐]]에서도 나온다. 물론 일본에도 비양심적인 인물들만 있는 건 아니고, 사람다운 사람도 있기는 했다. 이를테면 2011년 10월 3일 도요나가 게이자부로가 한국인 원폭 피해자를 40년간 지원해준 공로로 외교통상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http://www.yonhapnews.co.kr/international/2011/10/04/0602000000AKR20111004200700073.HTML?audio=Y|#]] 그러고도 일제는 [[하시마 섬]]에 강제로 끌려가 노역을 했던 조선인들이 원폭이 터진 나가사키에 강제로 다시 끌려가 잔해를 치우는 작업에 동원되는 끔찍한 일을 자행했다. 이들은 심지어 아무런 방호복 없이 맨몸으로 사역을 당했는데, 당연하게도 많은 이들은 오래지 않아 [[피폭]]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당시 피해자들에 따르면 온몸에 붉은 반점이 생기고 피가 계속 분출했다.[* 하시마 강제노동 피해자 고 최장섭씨는 나가사키 원폭 복구 작업 중 너무 배가 고파서 당시 땅에 버려진 곡식을 볶아 먹었다가 피부와 몸에 이상 반응이 오며 피폭되었다. 하지만 미국의 원폭이 없었다면 그 지옥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인터뷰하였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 한국인 희생자를 기리는 [[https://ko.wikisource.org/wiki/%ED%95%9C%EA%B5%AD%EC%9D%B8_%EC%9B%90%ED%8F%AD_%ED%9D%AC%EC%83%9D%EC%9E%90_%EC%9C%84%EB%A0%B9%EB%B9%84|위령비]]가 서있다. 유명한 한국인 원폭 피해자를 꼽는다면, [[대한제국]]의 황족인 [[이우]]도 이 투하로 인한 [[피폭]]으로 사망했고, 또한 [[일본프로야구]]의 유명인인 [[장훈(야구선수)|장훈]]의 큰누나 역시 원폭으로 강한 전신 화상을 입었고 제대로 치료도 못해 12살 나이로 사망했다.[* 또한 장훈은 피폭자 수첩을 가지고 다녔는데, 이는 일본 프로야구 선수 중에서도 단 2명뿐인 사례다. 나머지 하나는 전 롯데 감독이었던 노닌 와타루.] [[https://news.joins.com/article/23544622|#]] >(원폭 때) 밤처럼 깜깜하고, 덥고, 냄새가... 사람 타는 냄새? 무슨 소리인지 모르지만 큰 소리, 고함을 지르면서 이 강[* 히로시마 겐코 강. 장훈 가족은 강 바로 옆의 조그마한 집에서 살았다.]에 들어가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그렇게 이쁜 우리 누나... 하루 정도밖에 못 살았어요. 아프다, 덥다... 아츠히(暑ひ/暑い)[* 덥다, 뜨겁다의 일본어. 문맥상 '뜨겁다'라고 하고 싶었던 듯.][* 앞은 역사적 표기법, 뒤는 현대 표기법.]? 덥다(라고 했어요.). 어머니는 하루 정도 울면서 약도 없고 의사도 없고. 자기 딸이 죽는 걸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어요. >---- >[[장훈(야구선수)|장훈]]. KBS 휴먼다큐 사미인곡 출연 당시 소회. 장영준은 원폭 투하 3일 후 부친을 찾아 나가사키시로 왔다가 폭심지 근처를 지나면서 피폭당했고, 2009년 1월에 수첩교부를 신청했지만 나가사키시가 "증인이 없다." 라며 거부하자 소송을 냈다. 안타깝게도 장영준은 승소 소식을 듣지 못하고 8월 17일에 사망했다. 2012년 9월 18일, 나가사키 지방재판소가 [[http://www.47news.jp/korean/national/2012/09/049964.html|나가사키시는 한국인 원폭 피해자 장영준 씨에게 원폭 수첩을 교부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이후로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는데, 나가사키 시에서 증인이 없다는 이유로 또 거부하자 2016년 9월 27일에 한국인 2명이 소송을 제기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oid=001&aid=0008712067|#]] [[경상남도]] [[합천군]]에 원폭 피해자 복지회관과 평화의 집이 있는데, 원폭 당시 히로시마에서 사망한 한국인 중 피폭된 60%의 사람들이 합천 출신이라고 한다.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10/04/01/201004010500007/201004010500007_1.html|한국의 '히로시마' 경남 합천]]. 참고로 한국원폭피해자 협회 홈페이지도 있다. [[http://www.wonpok.or.kr|링크]]. 원폭 투하에 대한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의 의견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원폭 피해자임에도 [[http://asahikorean.com/article/asia_now/politics_society/AJ201308060093|"나는 원폭을 투하한 트루먼 대통령의 결단에 지지하는 부분도 있다."]]라는 견해를 밝힌 사람도 있고, "원폭을 투하하지 않았어도 전쟁은 끝났을 것이다. 미국은 반성해야 한다."라는 견해를 가진 사람도 있다. 현재까지 살아있는 생존자는 2,600여명이며, 일본 정부는 2015년까지도 이들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그후 1974년부터 2015년에 이르기까지 긴 세월의 소송 끝에 일본인 피해자에게만 이루어졌던 무료 전액 치료를 한국 정부가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당시 피해자들에게 일본 외 타국 어디에 있든지 진료비를 지원 받는 걸로 재판이 마무리 되었다. 2016년에야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2017년부터 시행되었는데, 이미 피해자의 대다수가 사망한 상황에서 어느 정도 실질적인 피해 보상이 이루어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한편 원폭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자식들도 '원폭 피해 2세 환우'가 되어 진상 규명과 의료지원 투쟁을 벌이고 있다. 활동가 [[김형률]]을 중심으로 2000년대 초반 결성된 '한국원폭2세환우회'는 다른 시민단체들과 함께 계속된 투쟁을 해왔다. 2세의 경우 투하 당시 태아 상태가 아니면 의료비 지원을 받을 수 없다. 2021년 10월에 추진된 지 30년 만에 나가사키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들어섰다. [[https://m.yna.co.kr/view/AKR20211013104651073?section=international/all|#]] 2023년, [[윤석열]] [[대한민국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이 히로시마 [[G7]]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에 공식 참배하였다.''' 2023년 영화 오펜하이머 개봉이 북미에서 [[바벤하이머]] 밈이 유행하자 일본인들이 매우 격양된 반응을 보였는데, 그중에 [[트위터]]의 한 일본인이 원자폭탄의 피해자로 한국인 등 다른 아시아인들도 있다고 주장하자, "[[강제징용|왜 한국인들이 그곳에 있었을까?]]"라는 여러 나라 사람들의 반박이 달리기도 했다.[[https://www.dmitory.com/issue/287947736|#]]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